박지수VIEW PROFILE →
케이팝의 진짜 수출품은 노래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하이브의 글로벌 현지화와 'K' 없는 케이팝의 시대
이제 케이팝은 곡이 아니라 아이돌을 만들어내는 공정 자체를 수출한다. 하이브와 게펜이 만든 카티세이는 그 상징이며, 'K가 사라져도 케이팝은 커진다'는 역설과 정체성 논쟁을 동시에 불러온다.
케이팝의 세계적 성공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화려한 안무, 그리고 팬덤을 떠올린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케이팝이 세계에 내놓은 가장 강력한 수출품은 특정한 노래나 그룹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돌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정, 즉 '시스템' 그 자체다. 이 변화는 케이팝의 정의를 근본부터 다시 쓰고 있다.
과거의 수출 방식은 단순했다. 한국에서 만든 그룹이 해외로 진출해 공연을 하고 음반을 파는 형태였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차원이 다르다. 한국의 기획사들은 이제 아이돌을 길러내는 훈련 방식, 즉 노하우 자체를 해외 현지에 그대로 이식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케이팝이 3.0 시대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하이브와 게펜, 그리고 카티세이
이 전략의 가장 선명한 사례가 바로 하이브다. 하이브는 유니버설뮤직 산하의 미국 명문 레이블 게펜 레코드와 손잡고, 케이팝식 집중 훈련 시스템을 이용해 글로벌 팝 그룹을 직접 발굴하고 데뷔시켰다. 이들이 내세운 개념이 바로 '현지화를 통한 세계화', 즉 각 시장에 맞춰 콘텐츠를 현지에 뿌리내리게 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물이 걸그룹 카티세이다. 이 그룹은 케이팝 훈련 시스템을 거쳤지만, 멤버 구성은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주로 영어로 노래하며, 처음부터 전 세계 청중을 겨냥했다. 무려 12만 명의 지원자 가운데 선발된 20명의 연습생이 오랜 훈련 과정을 거쳤고, 2024년 6월 데뷔한 이후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시스템을 이식하다

핵심은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에 있다. 카티세이 같은 그룹에 적용된 것은 단순한 노래 레슨이 아니라, 한국식 아이돌 육성 시스템의 총체다. 보컬과 댄스 훈련은 물론이고 미디어 대응 교육, 인성 교육, 심리 상담, 스타일링, 그리고 식단과 체중 관리에 이르기까지, 삶의 방식 전체가 하나의 정교한 공정으로 설계되어 현지 연습생들에게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후발 주자가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진짜 경쟁력이다. 좋은 곡은 사들일 수 있고 화려한 무대는 흉내 낼 수 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다듬어진 '아이돌을 완성하는 방법론'은 오랜 시간과 노하우가 응축된 무형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케이팝은 이제 이 방법론 자체를 라이선스처럼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오디션의 세계 지도
이러한 개방성은 아이돌의 국적 지도를 완전히 새로 그리고 있다. 최근의 오디션 참가자들은 미국과 일본, 태국은 물론 한국, 아르헨티나, 스웨덴, 호주, 스위스, 브라질, 필리핀 등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이 반드시 한국인일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 이제는 예외가 아니라 흐름이 되었다.
이는 케이팝이라는 장르가 특정 국적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하나의 보편적 포맷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케이팝은 힙합이나 록처럼, 발원지는 분명하되 전 세계 누구나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하나의 양식으로 변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K'가 사라진 케이팝의 역설
바로 여기서 뜨거운 정체성 논쟁이 시작된다. 멤버가 한국인이 아니고, 노래가 영어이며, 활동 무대가 미국이라면 그것을 여전히 케이팝이라 부를 수 있는가. 'K가 줄어들수록 케이팝은 오히려 커진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이 장르가 세계화하면서 스스로의 정의를 어떻게 흔들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이 성공의 이면에는 그림자도 존재한다. 성과를 만들어내는 그 강도 높은 훈련 시스템은, 어린 연습생들에게 가혹한 경쟁과 통제된 삶을 요구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시스템을 세계로 수출한다는 것은, 그 빛나는 성취뿐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압박과 부담까지 함께 이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케이팝의 다음 장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그룹이 더 많은 음반을 파느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산업이 자신이 만들어낸 강력한 공정을, 사람을 갈아 넣는 기계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창작 시스템으로 다듬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노래는 세계 어디서나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스템을 어떻게 책임 있게 운영하느냐가 진짜 시험대가 될 것이다.






